그해 여름



그해 여름


by 炫


I.        시작


그가 눈을 떴다. 창가 사이로 비치는 따스한 햇살에 잠을 깼다. 햇살 사이로 비치듯 보이는 건 잠들어 있는 그녀의 얼굴이었다. 그는 따뜻한 햇살과 촉촉히 젖은 머릿결이 절반쯤 뒤덮은 그녀의 얼굴을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그녀는 계속 자고 있었다. 그가 입술을 모아 가볍게 바람을 만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흩날렸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맞춤을 했다. 아직도 그녀는 자고 있다.
그는 일어섰다. 조용히. 바지를 입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햇살은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손을 내밀어 테이블 위의 볼펜을 집어 들었다. 메모지도 한 장.
“가지마”
그가 집어 든 메모지엔 이미 그렇게 써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흐트러진 머릿결은 기분 때문이겠지. 아직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베게 옆에 메모를 두고 셔츠의 마지막 단추를 채운 그는 문을 닫고 나섰다.
눈을 감은 채로 여전히 잠을 자고 있는 그녀의 얼굴 위로 햇살에 반짝이는 눈물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그가 문을 닫고 나서자 바람이 메모지를 그녀의 머리 위로 살짝 띄웠다. 메모지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곁에서 멀어져 갔다. 햇살을 받으며 창가로, 창 밖으로 계속 메모지는 날리고 날렸다. 끝없이 날리던 메모지가 햇살로부터 벗어나 아직 마르지 않은 도로에 내려앉았다.
“안녕”
그렇게 쓰여진 메모지 위로 자동차가 물을 튀기며 지나갔다. 잠시 후 메모지는 다른 자동차에 짓밟혀 일그러졌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다.


II.        정주희


비가 잔뜩 오고 있었다. 2002년 스물셋의 여름. 축제는 언제나 여름에 있었다. TV에서도 거리에서도 온통 붉은색뿐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붉은색이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이 들어가 있기 시작했다. 그는 학교 근처에서 현석과 정수와 함께 술을 마시며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새 현석은 전반전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건너편에 위치한 여자들을 데리고 왔다. 현석은 그가 데려온 만큼 그녀들을 신경 쓰고 있었고 정수는 경기에 너무 열심이었다.
“정수야. 얘들 좀 앉히자.”
정수는 처음엔 현석을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재촉하는 현석의 말에 못이기는 듯 옆으로 자리를 내어 주었다. 현석이 한 명씩 자리를 만들어주는 동안 나는 한 여자에 시선을 빼앗겼다. Be The Reds 티셔츠가 그렇게 예쁘게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티셔츠를 조금 말아 허리와 배꼽을 살짝 드러내고 있었다. 현석이 멍하니 서있는 그에게 어깨를 툭 치며 윙크했다.
“어….”
그는 정말 어색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 바로 그녀가 앉았다. 그가 맥주를 들이켰는데도 그렇게 갈증이 날 수가 없었다. 연거푸 두 잔을 들이켰다. 입술에 묻은 쓴 맥주 거품이 느껴졌다. 정수는 계속 경기를 주시하며 슬슬 흥분하기 시작했다. 현석은 그런 정수에도 아랑곳 없이 옆에 앉은 여자에게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가 세 잔째 맥주를 들이키려 할 때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축구 안 좋아하세요?”
대답 대신 그는 세 잔째 맥주를 끝까지 들이켰다.
“좋아하는 것 같아.”
그가 비어버린 잔을 보면서 대답했다. 그녀는 그를 보면서 살며시 웃었다.
후반전이 시작된 듯 했다. 정수가 다시 흥분을 했기 때문이었다. 현석은 안주를 추가했다. 모두들 TV로 눈을 돌렸는데 그만은 그녀에게 모든 신경이 쏠렸다. 그의 눈앞에서 그녀가 아른거렸다. 그는 맥주를 마시면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현석, 정수, 여자일행들, 그리고 그녀에게 시선이 닿았을 때 자연스럽게 그는 그녀의 배꼽을 향했다. 비가 아직도 오고 있고 에어컨도 켜져 있는데도 그녀의 배꼽 주위에는 송글송글 땀이 배이기 시작했다. 그는 맥주를 머금고 그녀의 배꼽 주위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안주 나왔습니다.”
머릿속 그의 질주에 누군가 뒤에서 제동을 걸었다. 브레이크. 동시에 그는 들고 있던 맥주잔을 떨어뜨렸다. 잔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맥주가 사방으로 튀었다. 옆에 있던 그녀도, 현석도, 정수도 모두 잔이 떨어지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는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배꼽에 튀어버린 맥주 방울을 닦아내었다. 정수가 다시 TV에 눈을 돌렸고 모두들 차례차례 다시 TV로 시선을 집중했다. 그는 그의 손을 핥았지만 그냥 쓰기만 했다.
곧 경기가 끝난 듯 했다.
“이름이 뭐야?”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주희. 정. 주. 희.”


III.        사진


언젠가처럼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전혀 어색하지 않은 그런 느낌.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나면 그는 반사적으로 셔터를 눌러댔다.
“찰칵. 찰칵. ……”
그는 사진기의 셔터 소리를 즐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필름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도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끝없이 펼쳐진 도로 위에 칠해진 문득문득 하얀 형광 도료, 하나하나 규칙적인 보도 블록 위에 유일하게 깨져있는 다른 하나의 부서진 블록, 네온사인보다 네온사인에 비쳐 더욱 빛나는 구릿빛 계단틀, 쇼윈도의 조명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흔들리는 그림자, 어두운 골목에 들어선 담벼락에 새겨진 알 수 없는 낙서들, 하수구 사이로 흐르는 검게 빛나는 물. 그가 찍는 모델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찍지는 않았다.
“찰칵. 찰칵. 틱. 틱. ……”
필름이 모두다 돌아갔다. 그는 다시 가까운 벤치에 멍하니 앉아 필름을 천천히 감기 시작했다. 그가 필름을 감는 동안 버스가 한대 멈춰 섰다. 몇 명 안 되는 사람들이 버스에 오르고 내린다. 붉은색 핸드백을 든 세련된 아주머니, 유행이 한참은 지난 빛 바랜 치마를 입은 젊은 여자, 새하얀 스타킹에 갈색 체크무늬 교복을 입은 여학생 하나. 그렇게 버스에 타기 시작했다. 그는 가방을 열었다. 가방 속에 남은 필름은 한 롤 뿐. 버스는 곧 출발했다. 그는 일어서서 걸었다.
필름 현상소. 사진관. 무엇으로 불러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가게가 그다지 오래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는 그곳의 단골손님 같았다. 그는 모두 12롤의 필름을 맡겼다. 그리고 새로운 필름 몇 롤을 사고는 가게를 나섰다.
거리에서 눈을 뜨니 창이 넓은 찻집 속에 그가 있었다. 알렉산더. 그는 칵테일을 주문했다. 은은하지만 상큼한 향기와 달짝지근한 냄새가 코와 입을 적셨다. 그가 앉은 테이블과 벽에는 작은 낙서들이 있었다. 그 중 움푹 파인 곳의 낙서가 그를 이끌었다.
‘폭풍 같았다. 스물다섯. 그 해 여름. 모든 것이 폭풍에 쓸려 가듯 옛 흔적 없이 변했다. 스물아홉의 여름까지 많은 시간이 있었지만 쓸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다.’


IV.        선배


축제의 중심 그리고 축제의 절정. 이탈리아 전이 끝난 거리. 사람들은 모두가 미쳤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도 미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느끼려고 노력했다. 옆에서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여자 선배도 그에겐 조금 어색했다.
“오. 필승 코리아! ……”
그가 느끼기에는 함성은 너무 높았다. 응원을 외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한없이 작아지고 있었다. 마치 그는 끝없이 솟은 빌딩 속에서 끝이 어디인지 하늘조차 볼 수 없는 그런 존재 같았다.
그 속에서 그때 그 모습의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그를 빌딩의 꼭대기로 이끌어준 그녀를 그는 주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술과 얼굴을 마주하고 그가 손을 잡고 껴안은 그녀는 주희보다 조금 작았고 주희와 배꼽이 조금씩 달랐다.
“오. 필승 코리아! ……”
함성은 끝이 없었다. 그 속에서 유일한 소리는 그와 선배의 숨소리뿐이었다. 하나 둘씩 옷가지가 사라지고 가까워지면 질수록 고요하게, 더욱 고요하게 선배와 그는 서로를 부둥켜 안고 있었고 그가 선배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고요함과 숨소리만 거칠어졌다.


V.        바람 상자 가게


꽤 늦은 아침이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잤길래 하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그는 태양을 쳐다봤다. 눈부실 정도로 강렬한 태양이었다. 버스정류장에 이르자 주희가 생각났다. 주희의 햇살 같은 머릿결, 새하얀 얼굴, 그리고 눈물. 모든 것이 새삼 다시 떠올랐다. 아직 점심이라고 하기엔 이른데 테이크 아웃 커피점은 문을 열었다.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이라는 건 알았는데 도저히 제목이 생각나지 않았다.
버스정류장에선 버스가 오지 않았다. 그는 발을 떼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그는 허름한 골동품 가게 앞에 서있었다. 디스플레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으며 물건 또한 정리가 아니라 쌓아두는 수준이었다. 주인은 그를 보자마자 하품을 했다. 그는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다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주인을 향해 말했다.
“타이프라이터 없어요?”
주인은 다시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전자식?”
“아뇨. 상관없어요. 오래된 것일수록 좋아요.”
주인은 그를 잠시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그를 향해 다가왔다. 주인과 그의 코가 맞닿을 정도가 되었을 때 주인은 오른쪽의 선반을 뒤지기 시작했다. 반짝거리는 대형 오르골을 꺼내고, 술집에서 많이 본듯한 반짝이는 간판을 꺼내고, 이것저것 먼지가 쌓인 것들을 다 꺼내고 나서 주인이 마침내 뭔가를 양손으로 집어 들었다. 아이보리색 타이프라이터. 때가 묻고 먼지가 잔뜩 끼었지만 타이프라이터의 아이보리색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얼마에요?”
주인은 조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3만원”
그는 만 원짜리 두 장과 오천 원짜리 두 장을 건넸다. 그리고 타이프라이터와 함께 주인에게서 건네 받은 명함을 들고 나섰다. 명함은 흰색모조지에 은색으로 쓰여있었다.
‘바람 상자 가게’
그는 명함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VI.        우리는 특별해


시청 앞에서 주희를 우연히 다시 만났다. 다른 일행들 속에서 경기도 보지 않으면서 응원을 하고 있던 그는 어떤 남자와 함께 있는 주희를 보았다. 처음에 그녀를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는 다시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축구 안 좋아하세요?’
‘아니. 좋아해.’
그가 그녀를, 그녀의 배꼽에 다시금 빠져들고 있었다.
“뭐해?”
그의 정적을 눈치챈 한 여자가 그를 깨웠다. 그는 다시 그 여자를 껴안고는 인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키스를 했다.
경기가 끝났을 땐 이미 저녁이었다. 어둑해진 저녁. 같이 온 여자들 중 한 명과 호텔로 향했던 그는 일이 끝나고 홀로 거리로 나섰다. 도로엔 터뜨리고 남은 폭죽과 쓰레기들이 넘쳐났다. 그는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분명 주희였다. 종로의 긴 거리를 걸었다. 그는 낯선 사람들과 이리저리 부딪혔다. 그가 부딪힌 사람 중에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여자였다. 그리고 주희였다.
“아까부터 줄곧 찾고 있었어.”
라고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주희는 조금 초췌한 모습이었고 눈에는 눈물자국이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나는 주희를 이끌고 가까운 술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와 그녀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서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서로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우리는 특별해.”
그녀는 취해서 정신을 잃었다. 그는 술집이 문을 닫을 시간이 다 되어서야 종업원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그녀를 업고 나섰다. 술집을 나선지 몇 발짝 되지 않아 그녀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는 대답 대신 큰길에서 골목으로 향했다.
방안에서 그녀는 한없이 아름다웠다. 꿈에 그리던 그녀의 배꼽을 그는 어루만졌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그녀의 배꼽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정신 없이 그는 그녀에게 빠져들었고 그녀는 지쳐버린 그를 위해 메모를 했다.
“가지마”


VII.        타이프라이터


축제가 끝났다. 축제는 그의 사진 속에 언제나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타이프라이터는 그가 찍은 사진을 덧칠했다. 미완성인 그림에 마지막 덧칠로 완성하는 건 타이프라이터의 몫이었다.
“타닥. 탁탁. 타탁 탁탁. ……”
이상하게도 그는 그 타이프라이터의 소리가 좋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만큼이나 리드미컬하게 들리는 타이프라이터 소리에 그는 점점 취해갔다. 그의 손은 그런 그를 이해하듯 비틀비틀 춤추듯 움직였다. 혹시나 실수할까봐 그는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내 안의 프로이트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친구는 내 안의 프로이트를 부정한다. …”


VIII.        망각


2004년 6월. 날씨가 점점 무더워지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생각 없이 군입대를 했다. 무슨 이유로 입대를 했는지 의미조차 두지 않은 채 모두들 그러하듯 그도 늦게나마 입대를 했다. 그가 입대할 무렵 누군가 그의 머릿속에서 떠올랐지만 그게 누군지 그는 기억을 못했다. 그리고 점점 그가 흘리는 땀만큼 그의 기억도 조금씩 잃어 갔다. 그가 기억할 수 있는 건 얼마 남지 않았을 뿐이었다. 시간이 기억을 잠식하고 있었다.
입대한지 일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현석에게서 주희의 소식을 들었다. 우연히 현석과 통화한 그날 현석은 그녀를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현석은 그에게 말했다.
“늦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그가 그의 수첩에 적힌 그녀의 번호를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는 프로이트를 함께 찾았다.
“그녀를 찾았어. 연락해줘.”


IX.        프로이트


9월의 어느 날. 그는 여느 때처럼 사진을 찍고, 현상소에서 현상을 하고, 현상된 사진의 뒷면에 타이프라이터로 기록을 하고 있었다. 그가 기록한 사진은 계속 쌓여갔으며 그의 타이프라이터는 나날이 바빠지고 있었다. 그 무렵 그는 다시 주희를 만났다. 우연히 그가 찍은 사진에 들어온 그녀는 쉽게 그를 알아보았다. 사진 속의 그녀는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그녀가 그의 모델이 되어갈수록 점점 그녀의 존재는 커져갔다. 그 동안 그녀는 단 한번도 과거의 이야기를 묻지도, 하지도 않았고 그도 그랬다. 그의 프로이트는 말한다.
“그녀를 잡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줘.”
아날로그 필름 사진기로는 도저히 잡을 수 없었던 그녀. 그는 그녀를 찍기 위해 디지털 사진기를 빌렸었지만 헛수고였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프로이트는 그녀를 잡으라며 수십롤, 수백롤의 필름을 그에게 건네 주었다. 그는 예전처럼 셔터를 눌러댔다. 현상소에서 받은 천 장이 넘는 사진 속에서 그는 그녀를 드디어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빛이 바랜 사진처럼 그는 그녀를 잊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잊었다는 것 조차도 인지하지 못했는데, 그래서 그는 시간이란 건 모든걸 잊게 만들어버리는 강력한 약이라고 생각했었다. 기억해야 할 것이든, 잊어야 할 것이든 뭐든지 가리지 않고 지워버리는 시간을 그는 점점 숭배했다.
“끝이 아닌걸. 아직 살아 있어.”
프로이트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은 그의 프로이트를 부정했다. 모든 건 그렇게 시간이 바라듯이 잊혀져 갔다. 부정에, 부정, 그리고 또 부___정을 거듭하며 그의 프로이트도 몇 번씩 죽어갔다. 그의 프로이트가 완전히 사라질 무렵 그에겐 사진기도, 타이프라이터도 모두 그의 손을 떠나 어딘가 어두운 곳에서 먼지와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영원일 것만 같은 2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X.        모든걸 결정할 땐, close to you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햇살은 반짝거리고 모든걸 결정할 땐, 클로즈 투 유. 그는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계속 울렸다. 노랫소리로. 익숙한 그 음악이 들려왔다. 하지만 아무도 그 음악에 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음악을 멈추는 사람도 없었다.
여름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그 어느 날처럼. 일요일 아침 먼지 쌓인 턴테이블의 스위치를 넣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아. 컴퍼넌트.’
CD를 집어 들고 그는 컴퍼넌트에도 스위치를 켰다. 기억에 새겨진 그 음악이 흘렀다.
“바람이 솔솔 햇살은 반짝 모든걸 결정할 땐, close to you……”
그는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그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 곡이 끝나갈 무렵 그는 급히 뭔가를 찾았다. 어둠이 밝혀지고 쌓여있던 먼지가 쓸어져 내리고 그렇게 타이프라이터를 꺼내어 들었다. 타이프라이터는 더 이상 아이보리색이 아니었다. 그리고 조금 녹이 슬기도 했고 잉크 리본도 말라 버리기도 했지만 그의 기억을 살리기엔 충분했다. 그의 손은 틀림없이 타이프라이터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젠 사진에 더 이상 기억을 기록할 필요도 없었고, 음악을 들어도 더 이상 그 곡을 알기 위해 북클릿을 뒤지지 않아도 되었다. 타이프라이터는 허공에 문장을 찍어내고 있었고 그의 손가락은 다시 취한 듯 춤을 추었다.


XI.        다시 만나다


마지막 스물아홉. 모든걸 잊거나 뒤로 한 채 그는 정신 없이 한 해를 보내고 있었다. 아침 일찍 내린 눈으로 도로는 잔뜩 얼어붙어버렸다. 그는 운전석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며 길게 늘어서 있는 차량 행렬들 사이에서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빨아들였을 때였다. 그의 기억 속에서 턴테이블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누가 스위치를 넣은 걸까?’
그는 그의 낡은 레코드를 집어 든 그녀를 보았다. 그의 레코드를 집어 든 사람은 주희였다. 눈 속에서도 한없이 빛나고 있는 주희를 향해 그는 차문을 열어젖히고 뛰쳐나갔다. 뒤에서 출발하려는 차량들의 클락션 소리와 욕설도 뒤로 한 채 그는 그렇게 그녀를 잡기 위해 뛰었다. 뛰면 뛸수록 멀어지는 그녀를 끝까지 잡기 위해 계속 뛰었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 지고 입김이 드세어지는 만큼 그의 시야도 하얗게 흐릿해 졌다. 그는 호흡을 줄이고 입김을 적게 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 뛰었다. 그가 시야를 닦아내자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그녀를 잃어버린 채 수많은 빌딩 사이에서, 눈 속에서 멈춰 섰다. 아직도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XII.        그 해 겨울


그 해 겨울에 그는 없었다. 그는 겨울을 볼 수 없었다. 그와 함께 그의 프로이트도 영영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하지만 그는 주희를 만났다. 시작처럼 그는 그녀를 침대에 두고 일어섰다. 볼펜과 메모지를 차례로 집어 든 그의 눈에 들어온 메모.
“가지마”
세 번째였다. 점점 선명해지는 그녀의 메모. 그의 기억과 그의 존재는 희미해지고 있는데 그녀의 메모는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녀의 메모를 뒤로한 채 그는 일어서서 문을 닫고 나섰다. 그리고 눈을 떴다. 그 찻집. 현상소 근처의 그 찻집에 그가 있었다. 무심코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알렉산더. 익숙한 그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입술이 하얗게 젖어올 무렵 그는 그곳에 쓰여진 수많은 낙서를 보았다. 프로이트는 펜을 집어 들고 조용히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폭풍 같았다. 스물다섯. 그 해 여름. 모든 것이 폭풍에 쓸려 가듯 옛 흔적 없이 변했다. 스물아홉의 여름까지 많은 시간이 있었지만 쓸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20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