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티지 (The Prestige, 2006)

pres·tige////, ////L끌다 에서〕 n. 위신, 명성, 신망, 위세, 세력
  /national prestige 국위(國威)
 
/loss of prestige 위신[면목]의 상실
  /raise the prestige of 신망높이다

a. 세평좋은, 명문의, 일류
  /a prestige car 고급
 
/a prestige school 명문교

[유의어] prestigious보통 좋은 으로, prestige명성뽐내다좋지 않은 으로 쓰일 있다.

[!!!!! 스포일러 있음 ㅠㅠ]

프레스티지는 관객의 상상력과 관용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영화다. 그동안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들 – 메멘토, 인섬니아 등과 같이 개인의 능력이나 상황의 범주에 대한 상상에서 벗어나 이번에는 아예 개인이 사회의 기술에 대한 상식이라던지 인간의 인간성의 한계 등을 벗어나 극단적인 영화를 만들어버렸다.

쌍둥이 형제의 설정은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납득이 가지만 솔직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것은 납득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인간성을 버리면서까지 집착하는 가식과 거짓에 대해 마술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고 있다. 특히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복제를 언급하는 유치함은 정도를 넘어서 관객이 그것을 얼마나 용인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과격한 형태로 질문하고 있다. 솔직히 하나의 인생을 공유하는 쌍둥이의 정신 상태는 물론이고 자신을 복제하며 살인을 일삼으면서까지 상대를 파멸시키려는 결정적인 장면들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기에도, 젓기에도 애매한 그런 상황일 뿐이다.

물론 마술과 과학을 소재로 본다면 이 영화는 틀림없이 일대 일의 관계라고 관객이 예측했던 상상을 깨고 다(多) 대 일(一), 향후에는 다(多) 대 다(多)로 발전하는 이야기로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주인공들의 갈등을 그리고 있는 영화이다. 분명 영화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이 영화는 결론을 어느정도 처음부터 보여줌으로서 관객을 우롱하는 기존의 방식(메멘토)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처음부터 그 설정을 부정하게 만드는, 소위 반전이라는 미명하에 관객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깨부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

하지만 기존의 놀란 감독의 작품들에서는 그 반전이라는 것이 등장인물 개인이 처한 상황과 등장인물 개인이 생각하고 있는 가정에 대한 반전이었기 때문에 관객에 그 주인공을 동정하거나 흡입되어 등장인물의 상황 하나하나에 대해 불편하게 보면서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반전은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이 반전을 이렇게 이해해 주시오하면서 다가서는, 이른바 관객이 가진 상식에 반하는 반전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번 작품은 관객이 사회에 대해 가진 상식을 좀 더 깨부수길 바라는 무리한 상상력과 관객이 인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상식인 인간성의 극단적인 모습에 대한 이해를 바라는 작품인 것이다.

덧. 그래도 화면이라던가 배우들은 참 좋더라. 부럽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