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r

본인이 얼마전은 아니고 몇달전에 blur의 22장짜리 싱글 박스셋을 샀더랬죠.
14만8천원이라는 가격에 눈물을 머금긴 했지만 지금까지도 열심히 듣고 있는 앨범입니다.

솔직히 blur는 오래전부터 좋아했다기 보단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요. 그래봐야 한 4년정도지만. @@
우연히 누구의 추천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스피리추얼라이즈드 처럼 역시 우연히 좋더군요 ㅡㅡ;;

그나저나 요즘같은 때에는 생각할 시간만큼 음악들을 시간이 많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Blur – For Tomorrow (Single 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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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op.tubemusic.com/musiccd/artist/artist_bio.asp?artistid=0200347

Blur’s Biography

브릿팝의 대표주자 Blur…지금은 브릿팝이라는 한 장르를 말할 때 그들만큼
브릿팝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그룹도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브릿팝을 모르는 사람도
Blur라는 이름만큼은 들어보았음직한 유명한 밴드이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Blur는 Damon Alban[Vocal], Graham Coxem[Guitar], Alex James[Bass],
Dave Rowntree[Drums]로 구성된 Essex주 출신의 4인조 밴드이다.

밴드의 프론트맨인 Damon은 런던근처에서 아버지 Keith와 Joan Littlewood 극장회사의
무대 디자이너였던 어머니 Hazel사이에서 태어났고 음악적으로도 아무런 불편이 없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70년대 후반에 그들은 Colchester로 이사하였다.

Damon은 어렸을 적부터 별난 존재였다고 한다. 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축구등을 하며 지내는것보다는 새를 관찰 한다던지, 아님
요상한곳(?)에서 술을 병째 들이마신다던지 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는 별나고 하찮게 여겨지기도 했으며 때때로 변태, 혹은 게이라고
블려지기도 하는 등 학교 내에서 문제아로 찍혀있었다.

그는 12살 때 Colchester에 있는 Stanway Comprehensive School에서
Graham을 처음 만나게 된다. 여하튼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관한 혼란스러움의
감각뿐만 아니라 음악에 대한 사랑, 음악적 재능에 대한 것을 같이 공유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곧 친한 친구가 되었지만 그 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어렸을적 부터 Damon은 연기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연기공부를 하러 런던으로 떠난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후에 그는 그가 배우가 될만한 자질이 없음을 깨닫고 음악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987년 런던으로 거처를 옮겨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면서
자신의 곡을 쓰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가 일했던 곳중의 하나가 West End호텔이었는데
거기서 그는 The Edge, Bono를 만나기도 했다.
(Bono는 술 취해 있었고 그에게 모욕을 줬다고 한다.)

그리고 1988년 런던의 Goldsmith’s에서 미술과정에 재학중이던 Graham을
다시 만나게 되고 그 둘은 데모테잎을 만들고 Circus라는 밴드를 조직하였다.
여하튼 그 와중에 Graham은 같은 학교 출신의 전부터 알고 지내던 Alex를 Damon에게
소개시켜 Alex가 베이스 담당으로 Circus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얼마후 드럼파트로
컴퓨터 공학을 공부하던 Dave Rowntree가 합류하게 되고 그들은 밴드명을
“Seymour”로 바꾸게 되었다. 펑크적인 냄새가 나는 밴드였다.

어쨌든간에 Seymour는 자신들의 데모를 Food 레코드사의 Andy Ross에게 보낸다.
거기에는 “Dizzy”, “Fried”, “Long Legged”등과 같은 노래들이 들어 있었다.
Andy는 감명받았고 Islington의 Powerhaus로 그들의 라이브를 보러가게 된다.

1989년에 Food 레코드사는 Seymour에게 접근했고 계약을 권했다. 네명의 멤버들은
레코드사의 두명의 우두머리 Andy Ross , David Balfe를 만나게 되고
계약을 하는것에 동의한다. 그들은 밴드 이름을 바꾸라고 강요당한다.
몇몇 이름들이 후보로 나왔는데 “The Shining Path”, “Whirlpool”, “Sensitize”
“The Goverment”등이 그것이었다. 결국 그들은 “Blur” 라는 이름에 동의했다.

1990에 그들은 공식적으로 Food 레코드사와 계약하게 되고 Graham 과 Alex는
그들의 학업을 때려치고 새로운 밴드로서 영국을 투어하기 시작한다.
음악잡지들은 금방 알아차렸고 Melody Maker지는 Damon의 별난 행동에 대해
“그는 분명 싸구려 쇠고기를 너무 많이 먹었다”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1990년 7월에 런던의 투어가 끝나고 그들은 음악저널리스트들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Battery Studio에서 녹음을 하기 시작한다.
그곳은 Stone Roses가 “Fool’s Gold”를 녹음한곳으로서 잘 알려져 있다.

1990년 10월에 Andy Ross가 “She’s So High”가 첫 번째 싱글로 선택되었다.
그 싱글은 캘리포니아의 아티스트 Mel Ramos의, 알몸인 여자가 물소위에
(물소맞나? 기억이 가물~) 엎드려 있는 그림으로 유명한데 그 그림은
티셔츠나 포스터등으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여러곳에서 그 포스터를 부착하는 것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그곡은 영국차트 40위권에 드는 성적을 기록한다.

1990년 12월에 Blur는 스튜디오로 돌아간다. 그리고 전설적인 프로듀서
Stephen Street가(The Smiths, Morrissey, The Cranberries)오게된다.
그는 Blur의 뮤직 비디오 “She’s So High”를 BBC 텔레비젼 프로그램에서 보았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작업하기를 원했다. 그는 이후 Blur와 쭈욱 같이 작업을 하게된다.
그들은 두 개의 싱글 “Come Together”와 “There’s No Other Way”을 녹음했다.

다음싱글 There’s No Other Way가 발매되고 차트 8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몇몇의 비평가들은 블러를 가리켜 “The Smith”이후의
영국최고의 밴드”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Maison Rouge 스튜디오에서 그들의 데뷔앨범 녹음이 시작되었고 Blur는 두 번째로
Top Of The Pops에 출연을 하게되는데 Damon은 종이로 만든
닭머리를 가지고 나와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1991년 8월에 그들의 데뷔앨범 Leisure가 발매되었고 차트 7위에 오른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그들에 대한 평이 가지각색이었다.
환영하는 쪽도 있었지만 무시하는 쪽도 있었다.

여하간 얼마 후에 그들은 미국진출을 위해 투어를 떠났지만 그때의 미국진출은
완전한 실패였다. ‘There’s No Other Way’는 차트 80위권에 겨우 들었을 뿐이었다.
이후 이것은 밴드에게 일종의 콤플렉스 비슷하게 작용하였고
이것은 훗날 Oasis와의 전쟁때 다시한번 그들에게 절망을 안겨준다.

후에 그들이 말하길
” 우리가 첫번째 앨범을 가지고 미국에 갔을 때 Nirvana의 Nevermind가 나타났다.
a어느 누구도 영국문화에 대해서는 눈꼽만치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a그때 우리는 미국진출을 접고 영국으로 되돌아왔고 그 Nirvana의 영향은 영국을
a침공하기 시작하였다. 보도진과 라디오는 완전히 그런지에 의해 점령당했다.”
라고 말했었다.

여하튼 그들은 미국진출의 꿈을 접고 영국으로 돌아왔으며 그것은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그들의 두 번째 앨범을 신중하게 어떻게 보면 편협하다고 할정도로 말할수
있을 만큼 영국적으로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나쁜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매니저가 재정적 곤궁에 빠져 그들의 1집으로 번돈을 가지고 튀어버린 것이었다.
어쨌든 1집으로 번돈은 거의 몽땅 날아갔고 매니저는 해고되었으며
Chris Morrison이 새로운 매니저로 들어왔다.

그리고 1992년 2월 Suede가 화려하다못해 요란뻑적하게 등장하면서
Blur의 위치는 더욱 어려워졌다. 음악잡지들은 Suede의 보위스타일의 글램록적인
이미지에 감명 받았고 그들을 “영국최고의 신인그룹”으로 다루었다.

1992년 봄에 새로운싱글 “Popscene”을 발매하였고 영국차트 30위권에 들게된다.
1992년 7월에서 Blur는 런던의 Town & Country club에서 Suede와 함께 공연을
하게되는데 한마디로 최악의 처참한 공연이었다. Suede는 긴장감있고, 에너지가 넘치는
공연을 보여준 반면 Blur의 공연은 술에 취했고 엉터리였으며
그들 자신도 당황 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David Balfe는 Damon에게 한달 안에 그들 자신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면
Food 레코드사는 Blur를 포기하겠다고 말을 했고 그들은 빠르게 곡을 쓰며
다음 앨범을 위해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동안의 혼란기를 거친 그들은 Maison Rouge 에서 다시 모였다.
그리고 그들의 2집 “Modern Life Is Rubbish”를 녹음하기 시작하였다.

프로듀서는 XTC의 Andy Partridge였으나 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처음에 그들은 결과에 만족하였으나 점점 불만족스러워졌다.

9월 초에 Graham은 The Marquee의 Cranberries
공연에서 Stephen Street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Blur와 다시 작업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11월초에 다시 새롭게 녹음이 시작되었다.
1992년 12월에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앨범을 David Balfe에게 가지고 간다.
그는 앨범에 대해 상업적이지 않다고 불평하였다. 그리고 몇 개의 노래들을
더 넣으라고 요구했고 ‘For Tomorrow’ 와 ‘Chemical World’가 덧붙여졌다.

1993년 5월에 런던의 한 대리석 기둥에 갈겨쓴 낙서에서 이름을 따온 두 번째 앨범
‘Modern Life Is Rubbish’가 발매된다. 이 앨범은 철저하게 영국적으로 탈바꿈하여
나왔으며 전의 1집도 그랬지만 이번 앨범역시 중산층의 생활을 재치있게 그려내고
있었으며 그들은 ‘제 2의 The Kinks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앨범 판매고는 그다지 신통치는 않았지만 비평가들은 이 앨범을 좋아하였다.

1993년 6월 “Chemical World” 가 발매되었고 10월에 2집의 마지막 싱글이자
세번째 싱글인 “Sunday Sunday” 가 발매되었다. 그리고 세번째 앨범 “Parklife”의 녹음에
착수하였고 다음해 2월에 “Girls & Boys” 가 발매되었고 5위까지 올라간다.

1994년 4월에 그들의 3번째 앨범 Parklife가 발매되었고 곧장 차트 1위로 등극하며
Blur의 전성기가 꽃피우게 된다. 영국을 분석적으로 산책하였고 자연스럽게 중산층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이 앨범은 그들의 사는 곳과 사람들, 문화, 삶, 껄끄러운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포착해 내었다. 1994년 5월에 “To The End”가 발매되었다.

1994년 6월에 Blur는 Glastonbury에서 연주하였고, Creation의 새로운 신인이자
자신들의 미래의 철천지 원수가 될 맨체스터 출신의 촌뜨기 그룹을 보게 되는데
그들의 이름은 바로 Oasis였다. (-_-;;)

9월에 “Parklife”싱글이 발매되었고 11월에 3집의 마지막 싱글이자 4번째 싱글
“End Of A Century”가 발매된다. 연말에 많은 음악 잡지들에서 “Parklife”는 최고의
앨범상을 휩쓸었으며 1995년의 Brit Awards에서 최고의 그룹, 최고싱글, 최고비디오,
최고앨범부분의 4개를 석권하는등 1994년과 1995년은 확실한 Blur의 세상처럼 보였다.

하지만 1994년 그들의 최대 걸림돌이 된 그룹이 등장하는데 바로 Oasis의 데뷔였다.
그들은 데뷔때부터가 이미 화려하여 심상치 않았지만 Blur는 그들을 신경쓰지 않았다.
Stephen Street와 함께 4집 “The Great Escape”를 Maison Rouge에서 녹음한다.

1995년 8월에 그 유명한 Blur와 Oasis 전쟁이 시작된다. 음악 미디어들에 의해서
맡붙여졌으며 그것은 단지 음악씬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소속레이블인 Creation 과
EMI도 얽혀있었고 뉴스를 전하는 신문도 가세한 독기품은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Oasis와 Blur의 관계가 처음부터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의 노래를
좋아한다고 했었고 서로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음악잡지에서
Damon이 Oasis를 욕했다는 발언이 나돌았고 그 성격 드러운 눈썹형제가 어떻게
나왔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가 있었다.

Oasis는 “Damon과 Alex는 에이즈에 걸려서 곧 죽을 것이다.(죽었으면 좋겠다.)”라고
독설을 뿜기도 했으며 그들은 Oasis의 음악이 “굴뚝 청소부 음악”에 필적한다며
우스꽝스럽게 해석하였다.

게다가 음악적으로의 문제를 떠나서 여기에 계급의식까지 끼어들었다.
중산계급을 대표하는 런던출신의 Blur와 노동자계급을 대표하는 시골 맨체스터
출신의 Oasis..뭐 이런식으로 전개가 된 것이다

그들의 대결은 가을로 들어오면서 점점 불붙기 시작하는데 그들의 “Country House”가
첫 번째 싱글로서 발매되면서 Oasis의 “Roll with it”과 맞붙었다.

또한 Damon은 어떤 라디오쇼에 게스트로
출연해서 (전화상이었던듯함) “Roll with it “를
연주하기도 했다. 그는 그것을 “Quoasis”라고 불렀고,
그리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Down, down, deeper and down..”

다음 일요일 그들의 싱글은 1위로 올라섰고
Oasis는 2위가 되었다. Blur 소속의 Food사와 EMI는
이일을 찬양하였다.

1995년 9월에 “The Great Escape”는 굉장히 열광적인
리뷰와 함께 발매되었다. 그리고 Oasis의 2집도
발매되었다. 처음엔 Blur가 이기는듯 했고 언론도
그들의 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바뀌기 시작하였다.
Oasis의 두번째 싱글 “Wonderwall”이 영국차트 상위권에
오르더니 끈질기게 그 자리를 고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995년 12월 Blur의 각멤버들 사이는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Q Magazine의 Adrian Deevoy와 밴드가 인터뷰를 가졌었는데
이때의 상황을 그는 이렇게 적었다.

” Graham은 기분이 몹시 나빠보였고 술에 많이 취한 상태였다.
a그는 Alex를 마음에 안들어 하고 있었다. Alex와 Damon은 눈을 서로 마주치지도 않았다.
aDamon은 Alex가 약을 너무 많이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Alex는 Graham과 Damon이
a자기를 대적시 한다고 여기고 있었고 Damon이 점점 심각하게 조울증 증세가
a되어간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Dave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a알수가 없었다. Graham은 사적으로 Dave에 관해서 많은 의심을 품고 있었다. “

그리고 Damon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Oasis와 유일하게 같은점은 우리는 미국에서 둘다 찬밥취급 당했다는거다”
라고 했는데 (쿠하하하!!) 이 멘트는 얼마나 바보같은 말이었는지 곧 밝혀지게 된다.

1996년 1월의 미국투어의 마지막달 동안 Blur는 다시 한번 절망하게되는데 Oasis의
미국앨범 판매고가 그들의 앨범 판매고와는 비교조차 할수 없게 불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싱글 “Wonderwall”는 빌보드 차트 10위권 내로 들었고 Oasis는 제 2의
비틀즈란꼬리표를 달고 대대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주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었다.

1996년 2월의 첫날에 Damon의 “우리는 모두 미국에서 찬밥이었다” 라는 멘트가
Q Magazine에 찍혀나왔고 그때 정확히 Oasis의 앨범은 미국차트 5위에 오르고 있었다.

자신들이 촌뜨기라고 무시했던 신인그룹이 자신들이 예전에 완전히 무시당했던
미국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있으니
(이번에도 그들의 앨범은 미국에서 별다른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가히 속이 뒤집히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 충격으로 Damon은 정신 병원에까지 드나들어야 했다고 한다 .

그리고 “St. Louis”의 녹음동안 커다란 말다툼이 Damon과 Graham 사이에 있었다.
그들은 휴식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스타일을 완벽하게
바꾸어야 할것을 느끼고 있었다.

1996년 3월 그들의 미국투어가 끝나고 Damon은 아이슬랜드에서 휴식을 취하였고
그곳은 그에게 재충전의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Damon은 Pavement의
Steve Malkmus와 만나게 되는데 Pavement는 그가 쓰는 새로운 곡에
많은 영향을 끼친 요인중의 하나였다.

1996 6월 Graham은 술을 독하게 마음먹고 끊었다.(요즘엔 또 마신다~ ㅠ.ㅠ)
그들은 5번째 앨범을 녹음하기 위해 프로듀서 Stephen Street와 엔지니어
John Smith와 함께 아이슬랜드로 떠난다.

아이슬랜드의 스튜디오에서 그들은 5집을 녹음하였고 그동안
그들의 관계는 드라마틱하게 향상되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을 Pulp와 함께 여러곳을
구경하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녹음은 끝났고 그들은 영국으로 돌아왔다.

1997년 1월 새로운 싱글 “Beetlebum”이 몇몇 쇼에서 선보여졌다. 비평가들은 그들이
회피적이라고 말했고 싱글은 상업적으로 실패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1월말 그 싱글은
차트 1위에 오르고 그들의 셀프타이틀 앨범 “Blur”역시 앨범차트 1위에 오른다.
하지만 이앨범을 두고 비평가들과 팬들은 말이 아주 많았는데
왜냐하면 이전의 그들의 성향과는 전혀 틀린 앨범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제 영국주류 팝음악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대부분의 곡들이
예전보다 더욱 하드해지고 노이즈한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예전의 중산층을 대변하는
가사는 개인적이고 감상적인 노랫말들고 대체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미국 얼터락 밴드인
Sonic Youth 와 Pavement의 영향도 무시 못할 것이었다.
그리고 이 앨범은 미국내에서도 어느정도 환영받았다.

“Song 2″가 영국에서 발매되고 차트 2위에 오르고 세 번째 싱글
“On Your Own”이 발매된다. 1997년 9월 Blur는 미국을 기점으로 한 세계적인
투어를 시작한다. “M.O.R.”은 그들의 셀프 타이틀 앨범의 마지막 싱글이었다.
그리고 그 앨범 발표후 각각의 멤버들은 자신들만의
다양한 프로젝트로 인하여 바쁘게 생활하게 된다.

그리고 1998년 Brit Award에서 그들은 Song2가 “베스트 비디오”와 “베스트싱글”에
노미네이트되었고 Stephen Street는 “베스트 프로듀서”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하였지만
아깝게도 상은 못받았다.

1998년 Graham은 자신의 레이블인 Transcopic를 만들었고 그는 1998년 8월에 자신의
솔로앨범 The Sky’s Too High를 발표하였다.
1999년 2월 그들은 “Tender”를 들고 돌아왔고 그것은 2위를 기록한다.

1999년 3월 그들은 6번째 앨범 “13”이라는 앨범을 발표한다. 13은 이제 그들의 과거로의
회귀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확고히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 앨범은 오랜 친구였던
프로듀서 Stephen Street와 결별하고 새로운 프로듀서를 맞아들여
작업한 첫 번째 앨범이기도 하다.

” 우리는 과거에 몇몇의 환상적인 작품들을 그와 함께 만들었죠.
a우리는 그를 정말 최고로 존경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을 하는것에 있어서의
a우리 자신의 길에 변화를 원하던 곳에 도달했습니다.”

13앨범은 전의 셀프타이틀 앨범 “Blur”와 비슷한 성향의 음악을 보여주고 있다.
첫싱글 “Tender”가 발표되었고 이는 별나게도 가스펠풍의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첫싱글은 이전의 Blur와 노래와는 다르게 차트 1위를 차지하진 못했지만
앨범은 차트 1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2000년 11월 그들은 지난 10년간의 음악생활을 정리하는 베스트 앨범
“The Best Of Blur”를 발표한다. 이 앨범에는 기존의 “END OF A CENTURY”,
“GIRLS & BOYS” ” COUNTRY HOUSE” “TO THE END”등의 기존의 히트곡들과
새로운 곡 ‘Music Is My Radar’등의 18곡이 실려있고 99년 12월에 영국 웸블리 구장에서
가졌던 Blur Singles Night Show의 라이브 시디도 같이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