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우야(女雨夜)
비가 왔다.
비가 오면 무작정 비를 맞으며 내리막길을 미친듯이 뛰었다.
대학 신입생 때가 생각났다.
장마철에 마지막 수업을 들으려 건물을 이동하는데,
꽤나 경사진 곳에서, 전공 서적을 몇권 들고 우산까지 들었음에도,
무작정 뛰었다.
그러다 무릎팍이 까이고, 우산은 부러지고, 바지는 튿어지고,
그렇게 되었어도 부끄러웠지만 마냥 좋았다.
이상하게 비가 오면 마음이 설레이는게
아마 나는 비의 계절을 기다리는 듯했다.
올들어 정말 오래간 만에 내리는 비라
기분이 좋을 법도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나는 더이상 뛸 수가 없었으니까.
언제나 비오는 날 입고있던 옷은 청바지였는데,
지금은 딱 맞게 디자인된 슈트.
정장이다.
정장을 입고나서부터는 조금씩 몸도 불어났다.
불어난 몸에는 정장만큼이나 편한 옷도 없었기에,
출근할때는 정장을 입는게 나았다.
정장 차림의 내가 조금은 어색한데 오늘 내리는 비는 더욱 어색했다.
내가 모르는 비인것 처럼 어색했다.
게다가 어제는 땀을 흘릴정도로 화창하고 더웠는데, 지금은 손과 발이 약간 시릴정도로 춥다.
거기다 이렇게 내리는 비는 이미 메말라버린 나를 자극하는 것 같아 싫었다.
더이상 흘릴것도, 내릴것도 없는데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과거 비의 계절은 짧지않았다.
늘 어중간할 때 쯤 와서는 어중간할 때 가버리곤 하는 비의 계절.
언제나 옷이 더러워지고 외출도 자제하던 시간인데,
난 왜 그토록 좋아했을까.
비를 맞으며 웃었던 기억도,
비를 맞으며 언덕을 오르내리던 기억도,
비가 그치지 않았으면 하고 기도하던 기억도,
모두 기억난다.
하지만 오늘 비는 싫었다.
내일도 만약 비가 온다면 싫을텐데.
아마 난 더이상 비의 계절을 기다리진 않는가 보다.
2. 일생을
눈을 뜨면 다시 올것 같았다.
비처럼.
비는 언젠가 다시 찾아오는데, 그렇지 않았다.
차라리 꿈을 꾸었으면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간간히 꿈을 꾸면 순식간에 깨어나곤 했다.
꿈은 현실과 너무 다르거나, 현실과 너무 같아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시 침대에 누으려고 했지만 축축히 젖어버린 셔츠 때문에 그냥 누워있기가 그랬다.
셔츠를 벗으며 생각했다.
실은 아무 생각조차 못했다고 해야 옳을텐데
지금에서도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할수가 없었다.
다만, 그 기분이 어떤지는 머리와 몸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약간의 흥분상태에 있었다.
보통의 정상적인 생활이었는데,
그냥 자신의 현재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짙게 배여 있었다.
그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달래고 싶었다.
전화를 해댔다.
사람들을 찾았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은 갑자기 무슨일이냐고 물었지만
난 마치 축축히 젖어버린 셔츠처럼 턱 하니 테이블에 붙어 횡설수설했다.
그리고 안절부절했다.
전화가 오면 깜짝 놀라고, 그렇게 전화를 받고, 전화를 끊으려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일이 힘든가봐’
설명할 수 없는 나는 나를 쳐다보기조차 싫었다.
계절이 싫었고,
사람이 싫었다.
그렇게 술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3.blue birthday to me
전화를 걸었다.
익숙한 노래.
이윽고 휴대전화의 건조한 노래에 이어 나오는 익숙하고 그리운 목소리.
뭐라고 이야기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서로가 집으로 향하고 있던 중이었고,
나는 약간 취했었고,
그녀는 약간 피곤해했던 것 같다.
익숙한 지하철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지하철을 타는가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게 기억이 난다.
“축하해”
내가 할 수 있었던 말.
그리고 이어진 말들은 내가 나의 감정에 취해서 했던 말들.
비가 그리웠는데 그립지 않은것 보다 더 슬픈 말들.
내가 더이상 비의 계절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았다.
점점더 비의 계절이 나에게서 멀어지기 때문에.
마치 그녀가 나를 피하려는것 처럼 멀어지기 때문에.
언젠가 그녀도 나에게 비의 계절처럼 쏟아지는 사랑을 주었다.
언젠가 그녀도 나에게 비의 계절처럼 좋아하지 않게 되겠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