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6번 출구를 나섰다. 나서자마자 내 눈앞에 가득한 건물들이 들어왔다. 그중에 나의 시선을 특별히 끄는 것은 지하에 있는 체코식 맥주집. 내가 그곳에 가는 것은 언제나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99년, 대학 입학 때부터 줄곧 알고 지내던 절친한 선배와의 만남. 그는 유난히 그 술집을 좋아했다. 넓고 시원하면서도, 입구가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관계로 손님이 많지 않아서 더욱 좋다고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손님은 아직 서너 명뿐이었다. 자리를 선택할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된 나는 제일 구석진 곳에 앉았다. 선배는 약속시간보다 10분정도 늦게 왔다. 선배는 직장에 들어가고 결혼을 하고 나서는 늘 바쁘다는 소리만 했다. 오늘도 그는 이 근방은 언제나 차가 막힌다고 투덜거렸다. 선배의 투덜거림에 내가 지하철을 타고 오시지 그랬냐고 대꾸하자 선배는 내게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야! 지하철은 여백이 없잖냐. 여백이.”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나처럼 바쁘게 사는 사람이 그 답답한 지하철을 타봐라. 속 터지고 숨 막혀서 죽을 거다.”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한 선배는 그날 흠뻑 취해서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직장에 일이 너무 많다느니, 주말에 가족과 여행 가느라 쉬지도 못한다느니, 친구들과 직장동료들은 거의 매일 술 마시자는 둥 약속잡지. 그러면서 내게 보여준 선배의 플래너는 정말 너무 빽빽했다.
“형. 어떻게 여백 있는 날이 하루도 없어요?”
“………”
선배는 한숨을 쉬더니 내게 이렇게 말했다. 여백 있는 삶을 살라고. 자신은 이제부터라도 여백을 가져보겠노라고. 내일의 보고가 끝나는 대로 자신도 여백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선배와 헤어진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 정거장의 광고판이 철거되고 있었다. 수많은 광고판 중에 하나의 광고판이 철거되는 것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계약이 끝났으니 철거되는 거겠지.
다음날 학교에 가는 길에 어젯밤에 보았던 광고판의 자리에 다른 광고판도 없이 새하얗게 텅 비어버린 것을 보았다. 텅 비어버린 광고판은 그 하나뿐만 아니라 몇 개가 더 있었다. 그것을 보며 나는 지하철에도 여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제 여백이 없다고 지하철을 싫어한다던 선배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내가 만난 그 선배가 어젯밤 음주 운전으로 교통사고가 나서 죽었다고. 그 장례식에 같이 가자고. 그렇게 친구는 말했다. 여백을 원했던 선배는 왜 그렇게 취해놓고서 스스로 운전을 하고 간 걸까. 여백을 만들고 싶어 했던 선배는 생각해보니 거의 한 번도 여백을 가지고 살았던 적이 없는 듯 했다. 지하철에도 여백이 있는데, 선배는 왜 없다고 했을까. 모든 곳에 여백이 있어 보이는데 선배는 왜 여백을 갖지 못했을까. 선배의 플래너에 적혀있던 오늘의 약속이 생각난다.
‘AM 09:00 이사회 보고
AM 10:00 사업 보고
AM 12:00 팀 전략회의
……
PM 11:50 준영이 생일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