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첨
돼지꿈을 꿨다. 돈이 나를 향해 한없이 쏟아지는 그런 복스러운 꿈. 하지만 난 그런 꿈을 꿀 필요가 없었다. 우리 집은 대대손손 복권 당첨 집안이다. 아버지도 그러셨고, 할아버지도, 증조, 고조, 그 윗대 할아버지들 모두 무언가에 당첨된, 당첨 인생을 사셨다. 그 이유는 우리 집이 운을 부른다기 보다는 내 손에 들린 이 황금빛 당첨 노트 때문이었다. 로또면 로또, 즉석 복권이면 즉석 복권. 그냥 번호만 적어도 알아서 1등으로 만들어 주는 이 놀라운 노트. 불과 두 달 전에 아버지께 물려받은 이 노트는 내 인생의 빛과 같은 존재였다.
헌데 아버지 말씀으로는 이 노트는 1년에 한번만 당첨시켜 준다고 했다. 그러니 마구 쓰면 안되는 것이다. 아버지도 가장 당첨금이 높은 복권 번호만 썼다고 했다. 그러시며 거실에 걸려있는 수많은 당첨 복권 액자들을 쓸쓸한 눈빛으로 쳐다보셨다.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나는 올해 꼭 당첨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다행히 지난 회차 로또는 1등 당첨자가 없어 이월되었다 현재 누적 당첨금은 150억. 난 우리 집에 걸린 150장의 당첨복권만큼이나 150억 상금이 의미가 있는 숫자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미 로또를 사두었고, 지금은 그 발표만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형이 폭행을 당해 병원에 있다는 소식이었다. 복권 당첨을 그리도 혐오했던 형은 아버지가 물려주려는 당첨 노트를 거부한 채 집을 나섰다. 그리고 형은 스스로 돈을 벌며 우리 집의 당첨 인생을 부정하였으며, 결혼생활이 오래가지 못하고 홀로 사시는 아버지와는 달리 한 여자와 10년 째 형의 표현으로는 ‘가장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형은 형인지라 병원으로 간 나는 형의 상태를 물어보다가 형이 즉석 복권에서 1등으로 당첨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알고 보니 형은 그 당첨으로 인해 형과 같이 있던 사람에게 폭행을 당하고 복권을 빼앗겼다고 했다. 나는 불현듯,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1년에 한번만 쓸 수 있다는 당첨 노트 규칙을 떠올렸고, 갑자기 당첨 노트를 그렇게 부정하고 혐오하던 형이 당첨 노트를 나 몰래 사용했다는 사실 때문에 너무 미워졌다. 나는 형의 병실로 들어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다짜고짜 삿대질까지 퍼부으며 욕을 했고, 형은 그런 나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병원을 나사서 절망적인 마음으로 팔자에도 없는 직장을 구해서 앞으로 1년간 일을 해야 하는 나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너무나 우울해서 친구들을 불러 밤새도록 술을 마신 나는 정신을 잃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뜬 나는 친구들도 하나 둘씩 잠에서 깨는 것을 보았고, 지나가던 노숙자가 자신의 잠자리에서 소변을 보고, 오바이트까지 하는 우리 일행에게 마구 욕하는 것을 참고 들어야 했다.
그때 그 노숙자의 손에 들린 스포츠 신문에 어젯밤 추첨한 로또 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난 주머니 속의 내 로또를 꺼내 당첨번호를 비교해보았다.
“6. 11. 12. 33. 42.”
믿을 수가 없었다. 당첨 노트는 아직 살아 있었고, 형은 나의 의심과는 달리 그 노트를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기쁜 마음에 친구들에게 로또를 보여주었다. 기뻐할 줄로만 알았던 친구들은 침묵을 지켰고, 노숙자와 친구들은 마치 한 팀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 긴장감. 엄지 손가락으로 꼭 잡고 있는 로또 복권. 주먹이 몇 차례 오고 가고 엄지 손가락으로 피가 흥건히 흐를 때, 난 그제서야 벽에 걸린 150장의 복권들이 왜 하나같이 지저분하고 붉은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매년 복권에 당첨되는 우리 집이 부자가 아닌 것도, 형이 왜 당첨 노트를 거부했는지 이제야 조금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