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턴 프리드만(Milton Friedman) 타계
경제원론 교과서에서 마저도 종종 거론되는 Milton Friedman이 타계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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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은 ….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172554.html
시카고학파 거두 밀턴 프리드먼 타계
케인즈주의 반대…자유방임·통화주의 주창
신보수주의 지주…“이데올로기 치우쳐” 비판도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요구하지 마라. 당신도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묻지 마라.”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유명한 취임사를 뒤틀어 <자본주의와 자유>의 서문에 담은 밀턴 프리드먼의 말이다. 자유시장주의 경제학을 대변하는 ‘시카고학파의 태두’ 프리드먼(94)이 1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 병원에서 숨졌다.
정부의 역할 축소, 자유시장 확대를 주창한 그는 1980년대 이후 미국 로널드 레이건 정권과 영국 대처 정권의 신보수주의 정책의 이론적 지주였다. 그는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와 함께 현대경제학과 실물경제 이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학자로 꼽힌다. 그의 경제철학은 통화연구를 통해 이론적으로 뒷받침됐다. 통화량이 경기변동에 끼치는 실증 연구를 통해 정부의 역할을 성장률에 맞춘 통화공급에만 한정하는 통화주의를 확립한 것은 그의 최대 성과로 평가된다.
그의 명성은 60년대 후반, 시장과 경제에 대한 정부의 적극 개입을 주문하는 케인스 경제정책이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의 동시 발생인 스태그플레이션을 불러올 것이라는 예측이 적중하면서 확립됐다. 자연실업률 개념에 입각한 이 업적으로 76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시카고대학 시절 형성한 시카고학파의 ‘시카고 보이’들은 자유시장에 입각한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전세계에 수출했다. 전성기는 80년대 레이건 행정부 때였다. 대통령 경제정책자문위원으로 활약하며 감세와 규제완화라는 레이거노믹스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하지만 80년대 중반 미국 금융산업이 위기를 겪고 통화운영도 예측이 어긋나면서 그의 통화주의 이론의 신뢰성은 큰 상처를 받았다.
그와 논쟁을 벌였던 로버트 솔로 매사추세츠대학 교수는 “82~90년 경기붐은 지출을 늘리고 세금을 감면한 레이건 행정부의 전형적인 케인스 정책 때문이라며, 이는 적자예산 확대의 고전적 사례”라고 <뉴욕타임스>에 반박했다. 현대경제학의 또다른 거두인 폴 새뮤얼슨은 “프리드먼은 자신을 과학적 인물로 생각했으나, 사실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열정으로 가득 찬 인물”이라고 비꼬았다. 그는 70년대 중반 민선정부를 쿠데타로 무너뜨린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부독재정권에 경제자문을 해줘, 이것이 평생 흠으로 남았다. 그는 피노체트가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실시하도록 해 정치적 자유의 토대를 닦았다고 변호했다.
1912년 뉴욕에서 헝가리 이민자인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 졸업 뒤 대공황이 터져 실업자로 지내다, 그가 나중에 비판한 케인스 정책을 도입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 수혜자가 됐다. 재무부에서 이 정책 입안에 협조했다. 40년대 초반에는 대변인과 보좌관을 지내며 소득세 원천징수 등 케인스적인 조세정책을 도입하고 홍보하는 구실을 했다. 그는 초기 뉴딜정책들은 그런 중대한 상황에서 적절한 대응이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그가 정부의 역할을 마냥 부정한 것은 아니다. 저소득자에게 정부가 보조금을 주는 역소득세, 저소득층 자녀에게 사립학교에 다니도록 보조금을 지급하는 바우처제도 등을 주장했다. 그는 정부의 역할은 자유시장의 틀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런 정부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그도 잘 대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후학인 신자유주의자들 역시 자유시장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답을 내놓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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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은 …. http://economy.hankooki.com/lpage/worldecono/200611/e2006111717373769760.htm
[‘통화주의 학파 창시자’ 프리드먼 타계] 그는 누구?
20세기 자유주의 경제학의 대가
“성장동력은 정부 간섭 줄인 시장의 자유” 주창
닉슨에서 레이건까지 美공화당 경제이론 제공
‘자유주의 경제학’의 큰 별이 졌다. 16일(현지시간) 94세를 일기로 타계한 밀턴 프리드먼은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 ‘케인즈 학파’에 대항해 시장을 강조하며 ‘애덤 스미스’를 다시 부활시킨 20세기 자유주의 경제학의 대가였다. 특히 ‘통화공급 조절을 통한 인플레이션 억제’와 ‘최소한의 규제를 통한 효율의 극대화’ 주장은 80년대 ‘레이거노믹스’의 근간을 이루며 경제 부흥을 이룩하기도 했다.
◇ ‘중요한 것은 통화, 권력 집중은 자유의 위협’=프리드먼이 원래부터 자유주의를 신봉한 것은 아니다. 프리드먼의 출발점은 케인즈학파였다. 하지만 케인즈이론이 30년대 대공황의 근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시장에 눈을 돌렸다. 그는 세계경제가 공황에 빠진 것은 경제활동이 위축됐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은행이 잘못된 통화정책을 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통화량을 늘려 경기 활성화를 꾀해야 했지만 정부가 오히려 공급을 줄여 극심한 신용경색을 야기했다는 분석이다. 이로 인해 통화교란이 생기고 결국 이것이 파국을 불렀다고 역설했다. 프리드먼은 이를 “통화가 정말 중요하다”와 “인플레이션은 통화적 현상이다”는 두 마디로 표현했다. 그를 ‘통화주의자’라고 부르는 것도 여기서 기인한다.
또 이 같은 상황은 프리드먼으로 하여금 정부의 역할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가져오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는 경제성장의 가장 큰 동력은 ‘시장의 자유’이며 정부의 간섭은 ‘최소한’으로 줄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권력의 집중은 자유에 대한 위협이며 역사가 이를 확인해 준다”고 주장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프리드먼은 정부 권력을 ▦법과 질서 유지 ▦사유재산 보호 ▦계약의무 이행의 보장 ▦통화제도 유지 ▦시장 경쟁 촉진 등 극히 제한된 범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필요악’으로 봤다.
◇ ‘닉슨에서 레이건까지’ 공화당 경제이론 제공=프리드먼의 이론은 세계 최강국 미국의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제 프리드먼이 대선 참모로 참여했던 70년대 리처드 닉슨부터 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시절에 이르기까지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집권한 시절 대부분의 경제정책이 그의 이론을 근간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레이건 정부 때는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80년대 미국경제의 화려한 부활을 이끈 ‘레이거노믹스’를 진두지휘했다. 이와 관련, 후버연구소에서 같이 일했던 마틴 앤더슨은 “그의 이론은 레이건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줬으며 그러한 확신은 더욱 굳어졌다”며 “이것이 ‘레이거노믹스’가 됐다”고 말했다. 그의 이론은 미국에만 멈춘 것이 아니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역시 재임 시절 “밀턴 프리드먼이 모두에게 잊혀졌던 자유의 경제학을 되살렸다”며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경제정책을 운용하기도 했다.
한편 프리드먼은 거시경제ㆍ미시경제ㆍ경제사 등의 분야에서 50여권의 저서를 남겼으며 66년부터 83년까지는 뉴스위크에 고정 칼럼을 기고하는 등 대중적으로도 유명한 몇 안되는 경제학자 중 한명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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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은 ….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511090
`자유주의 경제학` 거두 밀턴 프리드먼 숨지다
시장 신뢰 못 얻은 규제 정책 `정부 실패 부른다` 교훈 남겨
자유주의 경제학의 거두 밀턴 프리드먼 교수가 16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심장병으로 작고했다. 94세.
유대계 동유럽 이민가정 출신으로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개인의 자유와 시장 기능을 강조한 자유주의 경제학의 이론적 토대를 쌓았다. 그는 뉴딜 정책 이후 세계 경제학계의 주류로 군림하던 케인스 경제학과는 다른 길을 갔다. 케인스가 국가의 시장 개입을 정당화한 데 대해 프리드먼은 반대 입장을 취했다.
그는 1946년부터 30년간 시카고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통화주의(monetarism)를 정립했다. 이는 고전학파와 케인스 경제학에서 간과했던 통화정책의 중요성을 일깨워 줬다. 통화가치의 안정을 경제의 최우선 목표로 삼은 통화주의는 닉슨.포드.레이건 등 공화당 행정부와 영국의 대처 정부에서 꽃을 피웠다.
그의 통화주의는 67년 미국 경제학회 회장 취임 연설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는 취임사에서 인플레와 실업률의 ‘마이너스 상관관계(trade-off)’를 보여주는 ‘필립스 곡선’을 부정했다. 필립스 곡선은 통화량을 늘리면 물가가 오르고, 물가가 오를수록 실업률은 낮아지므로 당국은 적당한 수준에서 인플레와 실업을 관리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프리드먼은 통화량 증가가 장기적으로 실업률과 같은 실물변수를 변화시키진 못하며 인플레만 심화시킨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당국은 통화량의 증가를 엄격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먼은 이 같은 통화주의 경제이론으로 76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이론은 많은 추종자를 불러 모아 ‘시카고 학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통화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정부의 자의적인 정책의 폐해를 경고했다. 그는 정책이 시장에 가져올 효과는 매우 가변적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시장을 놀라게 하는 정책은 단기적으론 효과가 있지만, 장기적으론 시장의 적응 현상을 불러와 결국은 의도된 효과를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정부의 경제정책에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서강대 경제학과 곽노선 교수는 “갑작스러운 통화공급 등 시장이 예상치 못한 정책이 나오면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지만 결국 사람들의 기대(expectation)를 변화시켜 본래의 균형점으로 돌아온다는 프리드먼의 이론은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도 적지 않은 교훈을 준다”고 말했다. 즉 노무현 정부는 부동산 가격이 뛸 때마다 수요.공급의 시장 원리에 입각한 정책보다는 각종 규제 정책을 쏟아낸 탓에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정부의 실패’를 가져왔다는 지적이다.
프리드먼은 수많은 칼럼을 통해 마약 합법화와 의사 면허 및 자동차 면허 폐지 등의 혁신적 자유주의 정책을 제안하기도 했다. 많은 비판도 받았지만 그의 제안들은 ‘인간의 행동을 금지하고, 규제하고, 허가하는 것은 효과가 없고 비효율적인 관료제만 양산할 뿐’이라는 그의 소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정부 시스템보다는 개인들의 경쟁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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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은 …. http://www.chosun.com/editorials/news/200611/200611170393.html
[만물상] 밀턴 프리드먼
‘괴짜 경제학’의 저자인 스티븐 레빗 시카고대 교수가 저녁 초대를 받아 스승인 밀턴 프리드먼의 집에 갔다. 밀턴과 부인 로즈, 아들 데이비드까지 모두 경제학자인 프리드먼 가족은 식탁에서 내내 ‘도둑(thief)’을 들먹이며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도둑’이라는 단어가 앞뒤 맥락과 맞지 않아 레빗은 이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의문은 나중에 풀렸다. 프리드먼 가족이 말하는 ‘도둑’은 바로 ‘정부’였다.
▶프리드먼이 강의시간에 졸고 있던 학생에게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 “자, 이 경우 가장 효율적인 해결책이 뭐라고 생각하나?” 조느라 질문을 제대로 듣지 못한 학생은 순간적으로 가장 확률이 높을 것 같은 답변을 했다. “정부 예산을 삭감하는 것입니다.” 프리드먼은 흡족해했고 학생은 위기를 넘겼다.
▶정부는 도둑이기 때문에 정부 개입을 줄이는 것은 무조건 옳다는 것이 프리드먼의 평생 소신이었다. 정부가 할 일을 법·질서·안전 유지와 사유재산 보장, 시장경쟁 촉진, 장애인과 노약자 보호쯤으로 제한하고 나머지는 모두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 최저 임금제처럼 정부가 임금과 가격에 개입하는 정책은 모두 버려야 한다고 했다. 마약을 합법화하고 중앙은행을 없애라는 과격한 주장까지 폈다.
▶1960년대까지 프리드먼은 돈키호테 취급을 받았다. 케인스학파 로버트 서로 (이것도 ‘솔로’가 맞는 듯함. 조성일 각주) 가 프리드먼의 통화(通貨)주의를 조롱했다. “프리드먼에겐 세상 모든 것이 돈으로만 보이는 모양이다. 내겐 모든 것이 섹스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걸 마음속에 품고만 있지 프리드먼처럼 논문에 쓰지는 않는다.” 정부 역할 축소를 주장하는 공화당 출신 닉슨마저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라며 정부의 시장개입을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프리드먼은 방대한 실증적 증거를 앞세워 꿋꿋하게 자기 주장을 폈고 결국 세계경제 흐름을 시장 중심으로 돌려놓았다. 프리드먼의 주장은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레이건식 규제완화·민영화·감세정책)로 이어졌고 그가 세운 시카고학파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했다. 프리드먼이 94세로 세상을 떴다. “입만 열면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거의 어김없이 남들의 이익을 빙자해 자기의 영달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정부를 좌우하게 되면 국민의 경제적 복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의 말에 가슴 뜨끔할 사람들이 한국에도 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