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오아시스 vs. 연애소설
오아시스.
이창동은 소설가다. 그 이하는 아니지만 그 이상도 굳이 찾는다면 아니다.
이창동의 소설에 눈물을 펑펑 흘리기는 좀 어렵다.
그것은 쉽게 주인공에 동화되기보다는 주변에 분노하기 때문이다.
분노와 감동 혹은 슬픔이 기가막히게 교차하는 이창동표 영화는
오아시스에서 그 절정을 발휘한다.
오아시스의 다른 모든 명장면을 차지하고서라고 내어놓고 싶은 장면은
설경구가 문소리를 위해 나무를 자르는 그 장면이다.
그들은 그들이 육체적으로 거세되지는 않았지만 사회적으로 거세된 집단이다.
그들의 육체와 정신의 표현이 불편하다는 것은 곧
사회에서는 그들의 행위를 비정상적으로 인식한다.
그들이 그토록 그들의 사랑을 느끼고자 해서
그들이 정상인과 같은 방법의 섹스로도 표현이 될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사회가 그들을 거세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이유로 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섹스 이외의 사랑을 해야하는 그들에게
가장 멋진 애정 행각은 그 나무를 자르는 것이었다.
나무를 자른다는 의미는 공주에 대한 종두의 극적인 사랑의 표현이다.
이른바 나무를 자름으로서 그들은 그들의 섹스를 대신할 수 있었다.
이번 오아시스에서 이창동이 보여주는 이야기는
항상 극단적으로 나타나던 김기덕 등의 감독들과도 그 수위의 한계를 찾아볼 수 없으며
그 영상과 스토리의 우수성 역시 홍상수 등의 감독들과도 견줄만하다.
결국 오아시스는 이창동이 스스로 소리꾼에서 연출자로 나타난 영화일 것이다.
연애 소설
전형적인 상업 영화다. 상업 영화의 모든 요소에 또 모든 요소를 끼워넣은 최고의 상업 영화다.
근래에 이렇게 까지 상업적인 멜로는 본적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그 상업성 사이로 숨어있는 매우 교과서적인 내러티브 구조는
정말 박수치고 울어도 아깝지 않을 수준이다.
오히려 감동 받지 않았다면 대부분의 영화를 느낀다기 불가능할 정도다.
연애 소설의 강점은 기막힌 캐스팅과앞서 언급했듯이 내러티브의 구조에 있다.
적어도 나에게 대중적인 연기를 보여주던 차태현이 스스로 모험을 했다는 것.
그리고 ‘오! 수정’과 ‘번지 점프를 하다’로
단숨에 자신의 이미지를 끌어올린 이은주와의 호흡은
과히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서 손예진은 캐릭터 자체로써도 매력을 가지지 못하는 데에다
인물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연기에 그침으로써
앞으로의 전망을 좀 불투명하게 했다.
연애 소설의 최고 강점인 내러티브 구조는 정말 최상급이다.
전반부 희극, 후반부 비극으로 나뉠 수 있을 만큼 철저하게
분노를 제외한 모든 감정을 전달해준다.
그리고 영화는 단순히 전달에 그치지 않고
사진이라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매력적인 소재로
스틸의 멋까지 자유자재로 뽐내며
과거라는 애착에 최고의 동기를 선사한다.
그리고 모든 멜로의 전형적인 요소인 기막힌 장소 헌팅으로
영상의 미까지 좌지우지한다.
한마디로 연애 소설은 최고의 상업 멜로 영화다.
다만 한가지 걱정되는 것은 지금 이 한편의 영화로 보여진 이환 감독의 능력이
과연 이정향 같은 모습이나
그와는 다른 의미에서 발전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