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전

“뭐 작은거 하나라도 비슷하면 다 자기 얘기인것 처럼 얘기하잖아요”

영화의 모든걸 설명해주는게 대사라면 식상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너무 통쾌하거나. 홍상수 감독의 여섯번째 작품 극장전은 유머러스한 분위기의 신파(오! 수정!)도 아니며 장소와 시간을 넘어 이동하는 이야기(생활의 발견, 강원도의 힘)도 아니다. 홍상수 기존의 작품 중 일부를 떼어 놓고  제약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장편을 만든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영화다. 그리고 대사는 단편 영화처럼 너무 강렬해져서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급소를 찔러 정리한다. 감독은 그대로니 분위기는 역시 같지만 이야기는 이제 대놓고 극장으로 무대를 옮긴다. ‘극장전(劇場傳)’-극장에 관한 이야기이나 ‘극장전(劇場前)’-극장 앞에서라는 이야기나 풀어 놓고 보면 그게 그거다. 극장에 관한 이야기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적으로 풀어놓은 것이고 극장 앞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도 그 이야기가 현실의 형태를 빌린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관객은 1부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젊은 배우 이기우를 보고 감독이라 생각하게 되지만 2부의 영화 마지막에선 1부의 아저씨로 나온 김명수가 죽어가는 선배 감독으로 나타나게 된다. 대단히 혼란스러운 내러티브일지도 모르겠지만 제목의 의미만 이해한다면 그 이야기는 충분히 풀릴 수 있는 문제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는 이감독이 누구인지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거다.

“여배우라고 해서 특별한거 아니예요. 여배우도 똑같은 여자예요”

영화는 극중 1인2역으로 등장하는 엄지원이 보여주어야 할 여배우의 이미지를 부정하려 한다. 엄지원은 자신의 첫 작품의 감독인 이감독의 동창회에 나가 노래를 부를때 이렇게 소개한다. “배우 최영실입니다.” 그리고 사정없이 눈물을 흘린다. 노래의 박자도 놓치고 시작한다. 그날 낮부터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동수(김상경)을 떼어놓지도 못한채 결국 같이 술을 마시게 된다. 그리고 이감독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감독의 이야기를 대하는 두 화자의 태도는 너무나 다르다. 영실(엄지원)은 이감독을 감독으로서 바라보고 그녀 자신을 배우로 보며 이야기하고 있지만 동수(김상경)는 이감독의 주변인이나 후배로서 그를 언급하는게 아니라 단순히 영실의 머릿속에 담겨진 이감독에 대한 인식을 깨뜨리려는데 중심을 둔다. 이후 그녀는 스스로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부정하려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동수의 이야기에 동화되거나 설득된 것이 아니라 동수의 의견에 잠시 기울어졌던것 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영화(劇場傳)와 현실(劇場前)을 오해하고 있는(혹은 성장하거나 벗어나지 못한) 동수에게는 모든 것이 대사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오죽하면 그날 술자리에서 흘러나온 가십-그녀의 몸에 상처가 있다는-조차 믿는다. 그래서 그는 이야기한다. “우리 진짜 죽어버릴래요?” 그러자 잠시 동수에게 기울어진 영실이 일어나 신발을 신으면서 이야기한다. “동수씬 영활 정말 잘못 보신것 같아요” 결국 그녀는 이 대사 한마디로 스스로 뛰어난 여배우이자 뛰어난 여성임을 증명해버린다.

“자긴 이제 재미봤죠? 그럼 이제 그만! 뚝!”

1부의 영화가 영화로서의 이야기인 극장전(劇場傳)이었기 때문에 모든걸 혼동한 사람들은 영화가 제대로 끝난지도 모른채 2부의 극장 앞 이야기((劇場前)를 하게 되면 으례 두 이야기를 동일시 해버린다. 영화는 그런 의미가 아님을 가르쳐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스스로 성장하지 못한채 다만 스스로 자신의 과거와 같다고 생각하는 1부의 주인공의 모습을 버리기 위해 동수(김상경)는 말보로 레드를 구해서 피우고 섹스도 한다. 그때까지도 우리가 알고 있던 이감독의 모습(수능을 막 끝내고 자살을 시도하려는 1부의 남자 주인공)과 동수(김상경) 자신은 그렇게 일부만 변했을 뿐 동일한 모습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동수만이 성장하지 못했음을 동수가 병원에서 이감독을 실제로 만나면서 깨닫게 된다. 그걸 이미 알고 있는 영실은 이미 “그럼 이제 그만! 뚝!”하며 성장하지 못하는 동수를 나무란다. 동수를 본 이감독은 처절하게 이야기한다. “죽기 싫어” 결론적으로 영화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죽고 싶다’는 대사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결정될 문제이며 나아가 그것이 영화(劇場傳)와 현실(劇場前)을 구분짓게 해주는 좋은 장치가 된다.

과도한 줌의 사용

영화 내용 자체에서 벗어나 잠시 둘러보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은 모두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있기 때문에 그 현실성을 부정하기가 매우 힘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극장전의 과도한 줌 사용은 매우 당황스러운 발상이며 그의 전작들에서도 전혀 보이지 않는 모습이기에 관객들은 불편해 할 수 있다. 홍상수 감독은 인위적이며 낯선 카메라의 줌 속에서도 사람들의 모습은 현실적이기 때문에 ‘화면에서 현실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장치’라고 언급했지만 이 부분을 단순히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다. 워낙 낯설기 때문에 그의 줌인 사용은 다른 방법으로 해석해야 한다. 줌을 자주 사용한 영화들은 7,80년대 영화들이다. 그 영화들은 모두 홍상수 감독의 의도처럼 강조의 의미-피사체의 모습을 강조함으로써 피사체가 가진 느낌을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줌-를 지니고 있지만 현대의 영화들에서 줌의 의미는 그렇지가 않다. 이제는 줌이라는 것은 관객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다가가게 하는 장치로서 너무 직접적이기 때문에 세련미가 떨어져서 그다지 큰 호을을 얻지 못하는 데에다 줌을 남용하면 조악한 영상이라고 평가받기까지 한다. 줌의 남용이 조악한 영상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마치 홈비디오를 연상시키기 때문인데 홍상수 감독은 바로 이점을 노렸을런지도 모른다. 수많은 줌이 마치 생활속의 홈비디오를 연상시킴으로서 그의 영화가 전체적으로- 극장전(劇場傳)과 극장전(劇場前) 둘 다-생활의 일부분임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줌이 나오는 동안 관객들은 불편하면서도 직접적으로 현실을 언급하지 않는 영화에서 현실임을 깨닫게 된다.